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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강채식 
제목:    제네바 시편 찬송에 대하여-퍼온 글
* 아래 글은 성약출판사 홈피에서 퍼온 것입니다.


제네바 시편 찬송에 대하여

  김헌수 (대전: 성은교회 목사)


종교개혁과 시편 찬송

  

종교개혁은 ‘오직 성경’의 원칙 위에서 ‘오직 은혜’와 ‘오직 믿음’과 ‘오직 그리스도’를 전파하면서 진행되었다. 그런데 ‘오직 성경’과 함께, 그 말씀을 따라서 찬송하고 기도하는 일이 병행되었다. 성경을 번역하여서 회중에게 돌려준 개혁자들은 찬송도 전문적인 성가대에게 맡기지 않고 회중에게 돌려주었다. 회중에게 찬송을 돌려줄 때에 개혁자들은 만대(萬代)의 성도의 찬송인 시편으로 향하였다.

  

루터는 1521년에 신약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한 다음에 시편에 곡조를 붙여서 부르기 ‘시작’하였다. 1523년에 루터는 8곡을 묶어서 1524년에 「비텐베르크 찬송가」로 간행하였다.1) 루터의 노력은 스트라스부르(Strasbourg)의 개혁자인 마르틴 부서(Martin Bucer, 1491-1551)에게 이어졌다. 부서는 1525년에 「스트라스부르 찬송가」를 출간하고 시편을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시편 150편에 운율을 붙여서 찬송으로 ‘완성’한 사람은 제네바의 개혁자 존 칼빈이다. 칼빈은 악기를 다룰 줄도 모르고 음악 훈련을 받은 적도 없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그런 그의 지도 아래에서 시편을 부르는 회중이 탄생하였다.

  

시편을 부르는 회중은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고 깊고 풍부하게 전파하는 가운데 탄생하였다. 중세의 가톨릭교회에서는 라틴어로 예배가 진행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도 없었고 찬송도 전문적인 성가대에게 맡겨져 있어서 회중은 예배를 ‘관람’할 뿐이었지만, 이제는 모국어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일상적인 말로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 말씀으로 기도와 찬송을 드리면서 하나님과의 교제가 생생하여졌고, 냉랭하던 예배가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가득하게 되었다. 시편 찬송은 예배자의 마음을 주님께 표현하는 통로였고, 주님께서 마련해 주신 그 통로를 통하여서 언약의 교제가 더 긴밀하여졌다.

  

공적인 예배의 개혁은 사회 문화적인 영역에까지 확장되었다. 그 과정에서 ‘시편 찬송’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교우들은 식탁에 둘러앉아서 말씀을 읽고 찬송을 하였으며, 일터와 직장에서도 시편 찬송을 불렀다. 그 당시에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의 집에는 기본적으로 책이 세 권 있었다. ‘성경’과 ‘요리문답’과 ‘시편 찬송’, 이 세 권의 책이 공동의 신앙을 형성하는 중요한 도구였다. 이 글에서는 ‘제네바 시편 찬송’의 관점에서 종교개혁이라는 큰 주제를 살펴보려고 한다.

  

  

제네바 교회의 조직과 예배에 대한 규정 (1537년)

  

칼빈이 제네바에서 개혁의 일에 동참하려고 하였을 때에 그는 신앙고백적인 교회를 세우려고 하였고, 그 목적을 이루려고 시의회에 “제네바 교회의 조직과 예배에 대한 규정”(1537)을 제출하였다.2) 그 문서에서는 성찬의 회복, 공적 신앙고백의 중요성을 말하였고, 이어서 시편 찬송에 대하여서는 이렇게 제안하였다.

  

또한 우리는 교회에서 시편을 부르기 원합니다. 이것은 고대 교회와 바울 사도의 예에서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회중이 입과 마음으로 찬송하는 것이 좋다고 가르쳤습니다. 시편 찬송을 부를 때에 신앙이 굳세어지고 유익을 얻는 것은 실제로 불러보기 전에는 가늠할 수 없습니다. 우리 주위를 보면 신자의 기도가 매우 냉랭한데, 이것은 부끄럽게 생각하고 당혹스러워 해야 할 일입니다. 시편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들어 올릴 수 있고, 우리의 마음을 그분의 이름의 영광을 부르고 높이려는 열망으로도 이끌 수 있습니다. 더구나 이것은 우리의 유익과 위로로 인정될 수 있는 것인데도 교황과 그에게 속한 자들이 이것을 교회에서 빼앗아 갔습니다. 교황은 참으로 성신적인 노래이어야 할 시편을 그들만의 뜻 없는 웅얼거림으로 축소시켰습니다.

  

칼빈은 더 나아가서 어린아이들에게 시편 찬송을 가르쳐서 회중의 찬송을 인도하게 하자는 구체적인 제안까지 하였다. 그러나 시의회는 칼빈의 제안을 거절하였고, 결국 1538년 부활절 무렵에 칼빈은 파렐과 함께 제네바에서 추방당하였다.

  

  

스트라스부르 목회 시절 (1538-41) - 부서의 영향

  

제네바에서 쫓겨난 칼빈을 맞이한 사람은 스트라스부르에서 활동하던 마르틴 부서였다. 그는 칼빈을 스트라스부르의 프랑스 난민 교회의 목사로 청빙하였고, 칼빈은 여기에서 원만한 목회자인 부서에게서 실제적인 것을 많이 배웠다.

  

부서의 지도 아래에서 스트라스부르 회중들은 1525년부터 시편 찬송을 부르기 시작하였다. 1545년 부활절 주간에 이 도시를 방문한 어떤 사람은 자기의 인상을 이렇게 기록에 남겼다.

  

하나님의 말씀이 순수하게 전파되고 성례가 바르게 시행되는 곳에서 양심을 찾는 것이나, 사람들이 아름다운 시편과 하나님의 행하신 일을 찬송하는 것을 듣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믿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주일에는 다윗의 시편이나 신약의 어떤 기도를 찬송으로 불렀습니다. 시편이나 기도는 남녀의 구별이 없이 온 회중이 한 목소리로 불렀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장면이었습니다. 모든 사람의 손에는 시편 찬송 책이 들려 있어서 틀리지 않게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전에는 찬송이 이렇게 즐겁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이 작은 무리는 하나님과 그분의 복음의 영광을 드러내려다가 자기 나라에서 쫓겨나서 이곳에 온 사람들인데, 처음 닷새나 엿새 동안 나는 내내 울면서 지냈습니다. 슬퍼서 울었던 것은 전혀 아니고 그들이 마음을 다하여서 찬송하는 것을 듣고 기뻐서 울었습니다. 그들은 찬송을 드릴 때에 주님의 이름을 높이고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곳으로 인도하여 주심을 감사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이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모국어로 주님께서 행하신 기이한 일을 찬송하고 높일 때에 경험하는 기쁨을 다른 사람은 도무지 알지 못할 것입니다.3)

  

최초의 시편 찬송 (1539) - 마로와 칼빈

  

스트라스부르 회중이 사도신경과 몇몇 시편을 부르는 것을 보고서 크게 감명을 받은 칼빈은 열아홉 곡을 프랑스어로 옮겨서 “운율을 붙인 시편과 찬송시 몇 편”이라는 제목으로 1539년에 출간하였다. 열아홉 개의 시편 가운데 열세 곡은 프랑스의 왕 프랑스와 1세의 궁정 시인인 마로(Clement Marot, 1496-1544)가 운율을 붙였다.4) 그는 헬라어나 라틴어로 된 고대의 시를 프랑스어로 번역하였을 뿐 아니라 부서의 라틴어 시편 번역에 근거하여서 프랑스어 운율을 붙여서 시편을 재번역하였다. 그가 고전의 시를 번역한 것은 문제가 없었으나 성경을 평민의 언어로 번역한 것은 그 당시로서는 결코 안전한 일이 아니었다. 로마 교회는 그를 루터교도로 몰아서 투옥시키기도 하였다.5) 그는 안전한 곳을 찾아서 망명 생활을 시작하였다. 칼빈이 마로의 운율이 있는 시편을 어떻게 얻게 되었는가는 불확실하지만, 칼빈은 마로의 운율 시편을 즉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칼빈도 여섯 편에 운율을 붙였다. 곡조는 스트라스부르 교회가 사용하던 것을 그대로 가져왔다. 곡조 가운데서 상당수는 그라이터(Matthias Greiter)와 다흐슈타인(Wolfgang Dachstein)이 작곡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 가운데서 1562년까지 남은 가락은 열 개이고 나머지는 다른 것으로 대체되었고,6) 칼빈이 붙인 운율도 1543년 판에서는 모두 마로의 것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크게 바뀌었지만 1539년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해가 되었다.

  

제네바 시편 찬송 - 마로와 베자, 부르주와와 제네바 회중

  

제네바로 돌아온 칼빈은 1541년 교회법을 제정하고 시편 찬송을 더 추진하였다. 제네바 시의회는 스트라스부르에서 목회하던 칼빈을 청빙하면서 1539년에 출간된 시편 찬송을 100권 주문하기도 하였다. 시편 찬송을 만들고 부르는 일에 준비가 잘된 셈이었다.

  

1542년에 마로가 운율을 붙인 시편 30편과 칼빈이 붙인 것 5편을 주기도문, 사도신경, 십계명 등과 함께 출간하였다. 가락은 프랑(Guillaume Franc)이 붙였으리라고 추정한다. 1542년에 출간하면서는 세례와 성찬에 대한 예식문도 붙여서 인쇄하였고, 칼빈이 서문을 썼다.

  

1543년에는 49편의 시편에 운율을 붙여서 출판하였다. 마로는 1542년 8월 말에 제네바에 와서 칼빈과 음악 선생 프랑과 합력하여서 운율을 붙이는 일을 계속하였다. 그때 칼빈은 마로의 시적 재능이 자기보다 뛰어난 것을 보고 자기의 운율을 모두 마로의 것으로 바꾸도록 하였다. 칼빈은 1542년의 서문을 확대하여서 더 긴 서문과 함께 인쇄하였다. 마로는 제네바에 1년 정도 머물면서 시편에 운율을 붙이는 일을 하였지만, 제네바 시의회에서 음악 교사의 생활비를 충분하게 지급하지 못하였다. 마로는 제네바에서도 안착하지 못하고 이탈리아로 떠났다가 1544년에 객사하였다.7)

  

마로의 뒤를 이어서 운율을 붙이는 일을 완수한 사람은 베자였다. 베자는 제네바 교회의 예배에 참석하였다가 회중들이 시편 찬송을 부르는 것을 보고 감명을 받아서 스스로 운율을 붙이는 일을 시작하였다. 1548년에 칼빈이 로잔에 살고 있는 베자의 집에 방문하였다가 그가 시편 16편에 운율을 붙인 것을 보고서 그에게 그 일을 부탁하였다. 그는 34개의 시편에 운율을 붙여서 마로의 작품과 함께 1551년에 출판하였다. 1551년에는 83편을 묶었는데, 새로운 가락은 부르주아(Loys Bourgeois)가 쓴 것이다.

  

그러나 1551년 이후에는 그 작업이 잠시 중단되었다. 1556년까지 7편의 시편만 더 추가되었다. 그 기간 동안 회중은 이미 출판된 시편을 친숙히 익혔다. 어린아이들이 학교에서 먼저 배우고 회중이 따라서 배웠다. 시편 찬송을 배우는 일은 시간이 걸리는 일이었다.

  

베자는 1559년에 제네바 대학에 교수로 청빙을 받아서 왔고 이사 후에는 시편 찬송을 마무리하는 일에 박차를 가하였다. 1561년 성탄절 다음날 시편 찬송을 인쇄소에 넘겼는데, 이것이 1562년의 제네바 시편 찬송이다.

  

이 시편 찬송은 큰 호응을 얻어서 제네바에서만 27,400권이 인쇄되었다. 당시 제네바의 인구가 20,000명인 것을 고려하면 제네바뿐 아니라 다른 지역으로도 팔려 나갔음을 알 수 있다.8) 1565년까지 63쇄가 인쇄되어서 유럽의 도처에 퍼졌고, 합하면 1,400쇄 이상이 인쇄되었고 백 만권이 넘게 팔렸다고 한다.9)

  

제네바에서는 공예배를 드릴 때에나 요리문답을 공부할 때에 시편 찬송을 불렀고, 집에서도 가정 예배 시간에 불렀다. 그 당시에는 문맹률이 높았기 때문에 대개 외워서 불렀고, 특히 아이들을 먼저 가르쳐서 회중이 따라 부르도록 하였기 때문에 외워서 부르는 사람의 숫자는 더 많았다. 1549년에는 그동안에 출간한 시편을 17주일로 나누어서 부르도록 하였고, 1562년 완성된 후에는 25주일로 나누어서 시편 전체를 부르도록 하였다. 대략 한 주일에 30절 정도를 부르도록 하였다.10) 시편 찬송이 뿌리를 내리면서 제네바의 세속적인 노래와 음탕한 몸짓이 많이 사라졌고, 그러한 것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시편 찬송의 가사를 바꾸어서 조롱하는 노래로 부르기도 하다가 치리회의 권징을 받기도 하였다.11)

  

제네바 시편 찬송의 곡조는 단순하여서 부르기 쉬울 뿐 아니라 다양한 교회 선법(旋法, church mode)으로 사람의 마음을 하나님께 들어 올렸고, 운율이 붙은 가사는 암기하기가 쉬웠다. 따라서 교회 음악을 연구하는 전문가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칼빈의 원칙에 근거한 개신교의 찬송 역사에서 어느 시기나 장소를 막론하고 제네바 시편 찬송만큼 시와 노래의 보고(寶庫)가 되고 보편 교회적인 성격을 지니고, 통일성과 지속성을 견지하면서 널리 전파된 것은 없다.12)

  

  

  

성경과 고대 교회의 전통

  

음악적 소양이 없던 칼빈이 1537-62년까지 25년 동안 수고하여서 시편 찬송이 나오도록 노력하였다. 그러한 추진력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소극적으로는 로마 교회의 그릇된 예배를 개혁하려는 것이지만, 적극적으로는 성경과 고대 교회의 전통을 회복하려는 열망 때문이었다. 시편 찬송을 부르는 것이 칼빈에게는 ‘사도적 전통’에 속하는 문제였다.13) 따라서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필수적인 일이었다. 칼빈은 시편 찬송의 정당성을 성경과 사도적 전통에서 찾는데 이것은 부서에게서 배운 것이다. 부서는 성경의 다른 예들을 지적하지만, 결정적으로는 예수님께서 성찬을 제정하신 후에 시편 찬송을 부르신 것을 들었다(마 26:30). 또한 고대 교회에서도 시편 찬송을 불렀기 때문에 그 전통을 회복할 것을 주장하였다.

  

고대 교회에서 시편을 부른 예로 칼빈은 암브로시우스, 아우구스티누스, 아타나시우스를 든다(『기독교 강요』 4권 20장 32절).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보면 시편 찬송에 대한 느낌과 그 기원에 대한 설명이 그가 암브로시우스 감독에게 세례를 받을 때의 경험을 회상하면서 쓴 부분에 나온다(9권 6-7장).

  

나는 [세례를 받는 날에] 주님을 찬양하는 찬송과 노래를 듣고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주님의 교회의 아름다운 음악 소리에 얼마나 깊은 감명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 노랫소리는 내 귀에 흘러 들어갔고 그 진리는 내 마음속으로 스며들어, 안으로는 내 경건의 감정이 차고 넘쳤고 밖으로는 눈물이 넘쳐 흘러나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행복의 눈물이었습니다.

  

밀라노에 있는 교회는 최근에 와서야 위로와 격려의 찬송을 부르며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는데 교인들이 열심히 목소리와 마음을 합하여 찬송을 불렀습니다.…… 바로 이때 [황제가 암브로시우스를 박해하던 때] 이곳에서는 동방 교회를 본받아 교인들이 슬픔과 지루함으로 피곤해지지 않도록 찬송을 부르고 ‘시편을 노래하는 관습’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관습이 그때부터 지금까지 보전되어 이제는 전 세계에서 많은, 아니 거의 온 교회가 그것을 본받게 되었습니다.14)

  

아우구스티누스는 시편 찬송을 부르는 것이 동방 교회에서 전래된 것이라고 말하였고, 서방 교회에 소개된 것은 암브로시우스 때라고 하였다. 서방 교회와 동방 교회가 지속적으로 교류를 가졌던 것을 생각하면, 동방 교회에서 서방 교회로 시편 찬송의 전통이 전수된 것은 좀 더 이른 시기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15) 그렇지만 중요한 것은 기독교가 313년에 기독교가 공인된 후에 시편 찬송이 널리 퍼졌다는 사실이다.

  

로마 교회의 공적(功績) 사상과 중세의 찬송

  

사도적 전통을 생각할 때에 칼빈은 로마 교회의 ‘웅얼거림’을 용인할 수 없었다.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하는 것이 신자의 유익과 위로가 되기 때문에, 칼빈은 그것을 빼앗아 간 로마 교회의 예배를 비판하고 사도적 전통으로 돌아가려고 하였다.

  

사도적 전통을 생각하면, 로마 교회의 교리적인 타락이 예배식에서도 나타남을 알 수 있다. 로마 교회에서 정교한 미사 제도를 완성하고 라틴어로 시편 성가를 부르도록 한 데에는 로마 교회의 신학이 반영되어 있다. 사람의 행위로 의를 얻을 수 있다는 교리를 택하고 있기 때문에 미사 때에 라틴어로 된 시편을 한마디도 빠뜨리지 않고 부르는 것이 그들의 구원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교회에서 전문적으로 노래하는 ‘남성 소프라노’는 그 일을 위하여서 ‘거세’(去勢)하였다. 사람의 선행을 근거로 구원을 이야기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하였던 것이다. 로마 교회는 ‘선행에 기초한 구원’의 교리 위에서 더욱 형식적인 정교함을 추구하였다.16) 그러나 음악적으로 더 정교해질수록 회중과는 더 멀어졌다. 고딕 양식의 성당의 이층 발코니에서 찬양을 하면 그 소리가 천정에 부딪혀 아래로 퍼진다. 은은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있는 성당에서 오르겐 소리와 함께 그 찬송 소리를 들으면 그야말로 천상의 소리를 듣는 것과 같았다. 그러나 라틴어로 부르는 그 음악은 회중이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었다.

  

따라서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는 복음을 깨닫고 예배를 개혁할 때에 미사 때에 부르는 찬송도 철저히 재검토하였다. 츠빙글리는 할 수 있는 대로 빨리 “이 야만스러운 중얼거림”을 교회에서 제거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7) 제네바 예배 개혁에는 사제들이 라틴어로 찬송하는 것을 제거하는 것도 포함되었다.18) 미사가 말씀의 설교와 성찬에 의하여서 밀려난 것처럼 미사 때에 사제들이 부르는 노래도 회중이 그 의미를 알고 자기의 마음을 담아서 부르는 시편 찬송으로 대체되었다.

  

종교개혁과 회중 찬송

  

종교개혁은 ‘오직 말씀’의 원칙에 입각하여 은혜의 복음을 바르게 전하는 것에서 시작하였다. 강단에서 전파된 말씀은 다시 회중의 입에서 찬송과 기도가 되어 울려나왔다. 회중이 수동적으로 예배에 참석하고 성가대의 아름다운 찬양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신 그 말씀에 자기들의 마음을 담아서 찬송하였다. 회중의 찬송은 사람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신의 역사(役事)하심으로 되는 일이다. 회중이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로 찬송하는 것은 그들이 성신의 충만함을 입었을 때이다(엡 5:18-20). 하나님께로부터 배운 말씀으로 하나님을 찬송할 때에 성신께서 그 말씀을 사용하여서 회중을 깨우치고 회중을 더 깊은 진리로 인도한다. 1543년 6월 10일에 간행된 시편 찬송 서문에서 “그 시편은 성신께서 그[다윗]를 통하여서 말씀하시고 만들어 주신 노래”라고 한다. “그뿐 아니라, 마치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광을 우리 안에서 친히 노래라도 하시는 듯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입에 그 시편들을 두셨음을 우리는 시편을 부를 때 확신”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확신이 개혁의 원동력이었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을 찬송하고 나아가면서 그들은 새로운 구원을 맛보았다.

  

예배의 개혁이 종교개혁의 원동력이었고, 예배의 개혁은 생활의 개혁으로 이어졌다. 그들은 일상생활에서도 시편을 불렀다. 복잡한 신학 논쟁이 아니라 요리문답과 시편 찬송이 평민들의 마음을 지배하였다.19) 이것은 칼빈이 1543년의 시편 찬송 서문에서 소망한 것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다.

  

노래를 부르는 일은 더 넓은 범위에서 할 수 있습니다. 가정에서나 일터에서도 노래는 말하자면 오르간이 되어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우리의 마음을 그분께 들어 올리며 그분의 덕과 선하심과 지혜와 공의를 묵상하게 함으로써 우리를 위로합니다. 이것은 사람이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절실한 것입니다.

  

아쉽게도 한국에서는 시편 찬송의 전통이나 전례 음악의 전통이 소개되지 않았다. 대체로 19세기의 복음 성가가 찬송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말씀이 바르고 깊고 풍부하게 전파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찬송도 힘이 없다. 최근에는 그것에 대한 반발로 시편 찬송을 부르면 자동적으로 개혁교회가 되는 것처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러한 때에 칼빈의 “시편 찬송 서문”을 살펴보면서 시편 찬송의 정신이 무엇이고, 그 밑에 깔려 있는 ‘찬송의 신학’이 무엇인가를 살펴보는 것은 시의적절한 일이 될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각주

1) 졸고, “마르틴 루터의 『비텐베르크 찬송가』 서문 및 해설”, 「성약출판소식」 61 (2007), 13-16; “마르틴 루터의 시편 서문 및 해설”, 「성약출판소식」 63 (2008), 11-18.

2) “Articles concerning the Organization of the Church and of Worship at Geneva”, in Calvin: Theological Treaties, Standford Reid (역) (Library of Christian Classics, vol. 22; Westminster, 1954), 53-54.

3) W. van"t Spijker, “Der kirchengeschichtliche Kontext des Genfer Psalters”, in Der Genfer Psalter und seine Rezeption in Deutschland, der Schweiz und den Niederlanden 16.-18. Jahrhundert, E. Grunewald 외 편 (Max Niemeyer Verlag, 2004), 47; C. Garside, “Origin of Calvin"s Theology of Music, 1536-1543”, Transactions of the American Philosophical Society 69 (1979), 18.

4) 궁정 시인 마로에 대한 평가는 여러 가지이다. 그가 남긴 사랑의 시나 염문 행각을 보면 기독교 신앙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Pratt는 “마로의 영적 각성은 점진적이고 일상적이지 않으며, 논리적이라기보다는 다소 신비하다”고 평가한다. The Music of the French Psalter of 1562 (New York: AMS Press, 1966), 63.

5) C. Reuben, “Clément Marot: Poet of the Reformation”, Reformation and Renaissance Review 3 (2000), 80-83.

6) R. Terry, “Calvin"s First Psalter, 1539”, Journal of the Royal Music Assn 57 (1930), 4, 10. Terry는 개정에 대하여서 비판하는 입장이다.

7) P. Pidoux, “History of the Genevan Psalter (1-3)”, Reformed Music Journal 1 (1989).

  

http://spindleworks.com/library/Pidoux/History_Genevan_Psalter.html, 4.

8) R. Kingdon, “Uses of the Psalter in Calvin"s Geneva”, in Der Genfer Psalter und seine Rezeption in Deutschland, der Schweiz und den Niederlanden, E. Gruneward 외 편집 (Max Niemeyer Verlag, 2004), 25.

9) W. Blankenburg, “Church Music in Reformed Europe”, in Protestant Church Music, A History, F. Blume (ed.) (Norton and Company, Inc., 1974), 518-19; E. Doumergue, “Music in the Work of Calvin”, The Princeton Theological Review 7 (1909), 539.

10) R. Weeda, “Die Rezetion des Genfer Psalters im 16. Jahrhundert”, in Der Genfer Psalter - eine Entdeckungsreise, P. Bernoulli 외 편 (Theologischer Verlag Zuerich, 2001), 43.

11) R. Kingdon, “Uses of the Psalter in Calvin"s Geneva”, 28-32.

12) W. Blankenburg, “Church Music in Reformed Europe”, 530.

13) C. Garside, “Origin of Calvin"s Theology of Music, 1536-1543”, 10.

14)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선한용 역 (대한기독교서회, 2003), 290-92.

15) A. Cabaniss, “The Background of Metrical Psalmody”, Calvin Theological Journal 20 (1985), 194-96, 205.

16) R. Faber, “The Reformers on Psalms and Hymns in Public Worship”, Clarion 50 (2001), 137.

17) C. Garside, “Origin of Calvin"s Theology of Music, 1536-1543”, 11.

18) W. Blankenburg, “Church Music in Reformed Europe”, 516-17.

19) J. D. Witvliet, “The Spirituality of the Psalter: Metrical Psalms in Liturgy and Life in Calvin"s Geneva”, Calvin Theological Journal 32 (1997), 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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